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에 재상 김대성(金大成)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토함산의 동쪽 봉우리 아래에 동남향하여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데 석벽의 석재를 짜맞추어 인공석굴을 만든 것으로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을 본뜬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석굴은 전방후원의 형식이고 원형주실과 방형전실, 간도(間道)로 구성되어 있다. 주실은 구릉형으로 그 위에 봉토로 덮었으며 전실에는 원래의 지붕이 없어져 1963년 목조건물을 새로 덮었다. 굴 중앙에는 높이 3.48m의 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전실과 굴 입구 좌우 벽에는 팔부신상, 인왕 및 사천왕 등의 입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본존불 주위에는 천부입상 2구, 보살입상 2구 및 나한입상 10구를 배열하고 본존불 뒤에는 11면 관세음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천장 주위 10개의 감실안에는 좌상의 보살과 거사 등이 안치되어 있다. 따라서 석굴에는 모두 40분의 불(佛), 보살(菩薩), 천(天), 나한(羅漢)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조각들은 심오한 믿음과 우아한 솜씨가 잘 조화를 이룬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예술품이다.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 곧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웠던 것이다.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 전실의 네모난 공간과 원형의 주실로 나뉘어 있다. 주실에는 본존불과 더불어 보살과 제자상이 있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부조되어 있다. 석굴사원이긴 하지만 사찰건축이 갖는 격식을 상징적으로 다 갖추어 하나의 불국토를 이루었다.
석굴암이 창건된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큰 변화 없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보면 석굴암에 유숙하면서 석굴암의 장관을 찬미하고 그 절묘한 솜씨에 감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겸재 정선은 "교남명승첩"에 경주의 골굴암과 석굴암을 그려놓았다. 이 화첩은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굴암과 목조 전실을 첨가하는 데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삼백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말한다.
일제는 석굴암에 세 차례의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고 잘못 조립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불상들의 위치와 석굴암의 정확한 구조를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습기가 많은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천년을 넘게 버텨온 석굴암은 그 자체가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큼 우수한 것으로 자체적으로 환기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소재로 각광을 받던 시멘트로 석굴암 둘레를 막아버렸다. 결국 이는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차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석굴암은 해방 뒤 계속 방치돼 있다가 1961년에 들어서야 우리 손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이때는 이미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시멘트벽 때문에 내부 벽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등 보존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실내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일차 시멘트 벽 위에 공간을 띄어놓고 다시 시멘트를 바르고 석굴암 내부에 인위적인 환기장치를 마련하였다. 또한 석굴암에 악영항을 미치는 자연 조건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목조전실을 설치하고 또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유리벽을 설치하였다.
현재 일반 관람객은 목조 전실로 들어가 유리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만 석굴암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밖에 없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